“전쟁과 피난의 도시, 다시 일어선 부산”


기획 르포 ④

“전쟁과 피난의 도시, 다시 일어선 부산”


르포 서문: 불길 속에서 숨을 쉰 도시

1950년 6월, 한반도는 전쟁에 휩싸였다. 북에서 시작된 포화는 남쪽 끝까지 밀려왔고,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은 부산으로 향했다. 부산은 더 이상 한 지방 도시가 아니었다. 나라 전체가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, 임시수도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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1. 임시수도 부산 – 국난 속의 중심

  • 1950년 8월부터 1953년까지 부산은 대한민국 정부의 임시수도가 되었다.
  • 대청동 임시수도 정부청사, 경남도청, 초량 교회 등은 피난 정부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.
  • 그 시절 부산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, 국가의 심장이었다. 전쟁 속에서 행정과 정치, 경제와 문화가 모두 이곳에서 이어졌다.

2. 국제시장과 보리밥 – 생존의 기록

  • 국제시장은 전쟁 피난민들의 삶터이자 생존의 전장터였다.
  • 판잣집에 몸을 의지한 피난민들은 보리밥 한 끼로 하루를 버티며 삶을 이어갔다.
  • 시장 골목에는 군수품, 미군 물자, 일본에서 흘러온 잡화들이 뒤엉켰고, 여기서 오늘날 부산의 상인 정신과 시장 문화가 태어났다.

3. 판잣집과 바닷바람 – 피난민의 하루

  • 영도와 범일동, 초량 언덕에는 수천 채의 판잣집이 빼곡히 들어섰다.
  • 한겨울의 찬 바람, 여름 장마의 폭우에도 무너져 내리지 않고, 사람들은 그 속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었다.
  • “없는 사람들끼리 나눠 먹고 살아야 했다”는 말은 당시 부산 피난민들의 보편적인 기억이었다.

4. 후손들의 증언 – 여전히 살아있는 기억

“제 부모님이 피난민이었어요. 판잣집에서 태어나 어렵게 공부했지만, 부모님은 늘 ‘부산이 있었기에 우리가 살았다’고 하셨습니다.”
김모 씨(58세, 부산 거주)

“국제시장은 제 할머니의 청춘이었습니다. 그분이 없었다면 저희 집안도 없었겠죠. 부산은 저희 가족의 뿌리입니다.”
이모 씨(42세, 서울 거주, 피난민 3세)


5. 결론: 부산은 대한민국의 최후 보루였다

부산은 단순히 피난민을 품은 도시가 아니었다.

  • 나라의 정부를 지켰고, 수백만 국민을 지탱했으며,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희망을 만들어냈다.
  • 오늘날 부산의 활력과 개방성은 바로 이 전쟁의 기억과 피난의 경험에서 비롯되었다.

부산은 대한민국의 최후 보루였고, 동시에 새로운 시작의 땅이었다.